끝내는 데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 사업을 정리하며 지나온 시간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남은 물건들을 실어 갈 사람이 왔습니다. 재고 옷이 담긴 박스들, 그리고 사무실 집기들. 가구, 컴퓨터, 그 밖의 자잘한 것들.
제값을 받았다면 그 열 배는 됐을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박스들이 나가고, 집기들이 나가고, 공간이 비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보면서 든 생각은 아깝다도 아니고 서운하다도 아니었습니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네… 드디어 실감이 나더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시작하는 법을 알려주는 글은 넘칩니다. 창업하는 법, 도전하는 법, 다시 일어서는 법.
그런데 끝내는 법을 알려주는 글은 찾기가 힘들더군요.
이상하죠? 시작한 사람은 언젠가 다 끝내는데 말이죠.
퇴직이든, 폐업이든, 이직이든, 오래 하던 일을 접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보면 알게 됩니다. 끝내는 것도 생각보다 일이 많다는 것을요.
1. 끝내는 일에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결정이 선 순간, 제가 제일 먼저 한 건 정리가 아니었습니다.
기간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정리하겠다는 큰 틀을 먼저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뭘 해야 하는지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목록은 대충 이랬습니다.
- 지금 들어와 있는 오더 스케줄 파악
-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인 아이템 현황
- 재무 현황 — 받을 돈과 줄 돈
- 재고 현황
- 사무실 리스 — 건물 담당팀에 연락해서 알리기
- 기구와 사무 집기를 사갈 업체 리스트
- 직원들에게 알리기
- 거래처에 알리기
이 중에서 직원들에게 알리는 건 미루지 않았습니다. 정리를 시작하면서 바로 알렸어요.
나중에 말하는 게 배려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다음을 준비할 시간을 뺏는 일이니까요.
쓰고 보니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걸 목록으로 만들어두는 게 정말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효율의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목록이 없으면 머릿속에서 이 일들이 전부 동시에 떠듭니다. 재고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직원 얼굴이 떠오르고, 그러다 거래처 전화가 걱정되고, 그러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데까지 갑니다.
하루에 이 루프를 몇 바퀴씩 돌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목록에 적어놓고 기한을 정해두면, 그 생각들이 종이 위로 내려옵니다. 머릿속에 있을 때는 다 급한데, 적어놓으면 순서가 생깁니다.
저는 이 방법으로 잡생각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후회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같이 줄였습니다.
두려움은 대개 막연할 때 제일 큽니다. “이걸 다 어떻게 하지”는 무서운데, “이번 주에는 재고 정리”는 안 무섭거든요.
혹시 지금 뭔가를 끝내야 하는 자리에 계시다면, 결심 다음에 할 일은 실행이 아니라 기한과 목록입니다.
2. 제일 어려웠던 건 일이 아니라 호칭이었습니다
실무는 힘들어도 끝이 있습니다. 하나씩 지워나가면 언젠가 목록이 비어요.
진짜 어려운 건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느 회사의 니콜로 살았습니다. 그 회사 이름과 제 이름이 한 덩어리로 붙어 있었어요.
전화가 오면 회사 이름으로 시작했고, 사람을 만나면 명함부터 건넸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때도 하는 일부터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저는 꼭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것 같았고, 그게 무겁기도 했지만 사실 좀 좋기도 했습니다.
그걸 접는다는 건,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 자리를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불안하기도 했고요.
사실 저는 이 결정을 갑자기 한 게 아닙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업계 상황도 계속 기울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옷 만드는 게 싫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가 만드는 것들이 쓰레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만들고, 또 만들고, 샘플이 쌓이고, 그중 대부분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그러던 어느 날, 우울한 마음에 옷장 정리를 하다가 깨달았습니다. 하나씩 비워낼 때마다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어요. 힐링이 되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당연한 것을 말이죠.
비우는 게 이렇게 좋은데, 저는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일이 싫어지더군요.
아… 이건 더 이상 내 일이 아니구나.
주변에서 친구나 지인들이 그러더군요.
“왜? 그렇게 돈 많아?” “미쳤어?”
가끔은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좋겠다.”
같은 결정을 두고 미쳤다는 사람과 부럽다는 사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건 남이 판단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요.
3. 남은 물건이 제일 늦게 정리됩니다
거래처도 정리되고, 서류도 끝나고, 공간도 비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힘든 게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몇 가지 샘플들이요.
일하던 시절에는 안 그랬습니다.
샘플이 산더미로 쌓여 있으면 오히려 답답했어요. 이걸 다 어쩌나 싶고, 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고. 제가 디자인한 옷도 때 되면 그냥 처분했습니다. 미련이 없었어요.
만들면 또 나오니까요.
그런데 일을 정리하고 몇 가지를 챙겨두었더니, 그것들이 갑자기 소중해졌습니다.
같은 물건입니다. 예전 같으면 눈길도 안 줬을 것들이에요.
한동안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알았습니다.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니까 귀해진 겁니다.
사람이 그렇더라고요. 넘치고 흔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이제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갈망의 대상이 됩니다.
옷장 이야기는 40~60대를 위한 심플 옷장 정리법에 따로 적어뒀습니다. 그 글을 쓸 때만 해도 왜 못 버리는지 저도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4. 끝나고 나서 생긴 시간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머리가 멍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데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전화도 안 오고, 마감도 없고, 누가 저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평생 바라던 상태였는데 막상 되니까 무너졌습니다.
시간이 통째로 주어지면 사람이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저는 반대였습니다. 뭘 먼저 할지 못 정하고 하루가 갔습니다.
게다가, 저는 원래 시간이 넉넉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거든요. 급할 때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데, 여유가 있으면 멈춥니다.
여유는 선물처럼 보이지만, 받고 나면 숙제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아무도 안 가르쳐줍니다. 끝내는 법을 아무도 안 알려주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그걸 직접 만들어야 했습니다.
5.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다시 시작했습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거나 자격증을 따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상태도 아니었고요.
제가 한 건 하루를 다시 짜는 일이었습니다.
- 아침 명상과 스트레칭 시간을 늘렸습니다
- 운동을 주 3회에서 5회로 늘렸습니다
- 반려견 람보와의 산책을 길게 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있으니까요
- 가보고 싶은 맛집과 새로 생긴 카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곳씩 가는 일정을 짰습니다
- 그리고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목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대단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업 정리할 때 썼던 방법과 똑같습니다.
기한을 정하고, 목록을 만들고, 하나씩 합니다.
끝낼 때도 그렇게 했고, 다시 시작할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이더라고요.
가볼 카페 리스트를 만든 게 좀 웃기게 들릴 수 있는데, “이번 주에 갈 곳”이 하나 정해져 있으면 그 주에 뭔가 새로운 걸 경험했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중요했습니다.
빈 시간에 필요한 건 방향 없는 자유가 아니라, 여유로우면서도 규칙적인 일정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뭘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어떤 건지는 50대에 다시 시작하라는 말, 절반은 거짓말입니다에 좀 더 솔직하게 썼습니다.
마무리
지금 돌아보면 후회는 없습니다.
더 일찍 했으면 좋았을까, 안 했으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별로 안 합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까요.
다만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끝내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결심이 먼저고, 그다음이 기한이고, 그다음이 목록입니다. 실행은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한동안 멍합니다. 그것도 정상입니다.
그 멍한 시기가 지나면, 그제야 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블로그를 시작했습니다.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였어요.
지금은 이 일이 꽤 재미있습니다.
혹시 지금 뭔가를 끝내야 하는 자리에 서 계신가요. 퇴직이든, 폐업이든, 오래 다니던 곳을 떠나는 일이든.
무섭습니다. 저도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끝내야 보입니다. 당신의 또 다른 챕터가.
그리고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 모두 인생 살 만큼 살아왔기에, 사실 다들 생각보다 강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챕터에 계신가요? 닫는 중이신 분도 있을 테고, 이미 닫고 조금 멍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편하게 댓글로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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