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는 압축팩에 넣지 마세요 — 30년차 디자이너의 가을 옷장 정리
저는 지금 미국에 있는데 아직 한여름입니다.
한국은 곧 아침저녁이 서늘해지겠죠. 계절이 바뀔 때가 되면 결국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옷장을 뒤집는 일이요.
옷장을 열면 앞줄에는 여름 내내 입던 얇은 셔츠들이 걸려 있고, 뒷줄 어딘가에 작년 가을에 넣어둔 것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뭘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옷을 30년 만들었습니다.
디자이너로 시작해 제 의류 사업을 했고, 시즌이 바뀔 때마다 재고를 정리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뺄지 판단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절에 제가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름옷 어떻게 보관해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니트는 압축팩에 넣지 마세요.
이유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재고 정리는 잘했습니다. 제 옷장이 문제죠
일할 때 시즌 교체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판매 숫자를 봤습니다. 이번 시즌에 뭐가 얼마나 나갔는지.
그다음 다음 해 시즌 트렌드를 봤습니다. 내년에 이게 통할 것인가.
재고 정리 판단은 그 두 가지를 보고 나서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입니다.
물건을 먼저 보지 않았습니다. 숫자를 보고, 다음 시즌을 보고, 물건은 마지막에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판단이 쉬워집니다. 이 재킷이 예쁜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거든요. 안 팔렸고 내년에도 안 팔릴 것 같으면 빼는 겁니다.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제 옷장을 열면 이 순서가 통째로 무너집니다.
숫자가 없습니다. 다음 시즌 예측도 없습니다. 그러니 물건부터 보게 됩니다.
물건부터 보면 이런 생각이 먼저 옵니다.
"이건 안 입었지만 비싸게 샀는데."
"이건 안 맞지만 정말 예쁜데."
"이건 일할 때 입던 건데."
일할 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입니다.
오래 저는 이게 제가 나약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좀 다르게 봅니다.
재고는 상품이고, 제 옷은 제 시간입니다.
상품은 숫자로 판단할 수 있지만 시간은 그렇게 안 됩니다. 그 얘기는 40~60대를 위한 심플 옷장 정리법에 길게 썼으니 오늘은 넘어가겠습니다.
대신 이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집 옷장에도 그 두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판매 숫자 대신 — 올여름에 몇 번 입었나.
다음 시즌 트렌드 대신 — 내년 내 생활이 어떨까.
이 두 개를 먼저 정해놓고 옷을 보면, 옷 앞에서 흔들리는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순서만 바꾸는 겁니다.
2. 전부 꺼내라는 조언으로 저는 매번 실패했습니다
옷장 정리 글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단 전부 꺼내세요."
저는 이 방법으로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전부 꺼내면 바닥에 옷 산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판단해야 할 게 백 개가 됩니다. 이거 버릴까, 저건 남길까, 이건 어디에 넣지.
저는 머릿속이 쉽게 시끄러워지는 사람이라 여기서 그냥 멈춥니다.
저녁에 어떻게 되냐면요.
옷 산은 그대로 있고, 저는 지쳐 있고, 결국 다시 옷장에 쑤셔 넣습니다. 아침보다 상태가 나빠집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꿨습니다.
꺼내지 않고 시작합니다.
3. 1단계 — 꺼내지 말고 자리부터 바꿉니다
제일 먼저 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지금 입을 옷을 앞으로, 안 입을 옷을 뒤로.
옷장 문을 열고 여름옷을 한쪽 끝으로 밀어놓습니다. 가을에 입을 것들을 손이 먼저 닿는 자리로 옮깁니다.
버릴지 말지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위치만 바꿉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옷장에서 실제로 쓰이는 건 손이 닿는 30센티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있어도 없는 겁니다.
이 단계는 15분이면 끝납니다. 그리고 이것만 해도 아침에 옷 고르는 시간이 확 줄어듭니다.
여기서 멈춰도 괜찮습니다.
오늘 옷장을 다 끝내야 한다는 규칙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칸씩 합니다.
4. 2단계 — 여름옷은 세 무더기로만 나눕니다
앞뒤를 바꾸고 나면 뒤로 밀어놓은 여름옷을 처리할 차례입니다.
여기서도 판단을 최소로 줄입니다. 무더기는 세 개만 만듭니다.
하나. 올여름에 실제로 입은 것
내년에도 입습니다. 세탁해서 보관합니다. 고민하지 않습니다.
둘. 올여름에 한 번도 안 입은 것
여기서 버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 무더기는 따로 보관하세요.
내년 여름에 이 상자를 열었을 때 또 안 입으면 그때 답이 나옵니다. 두 시즌 연속 안 입은 옷은 앞으로도 안 입습니다.
셋. 상한 것
목이 늘어난 티셔츠, 얼룩이 안 빠진 것, 보풀이 심한 니트.
옷을 만들던 사람으로서 말씀드리면 늘어난 목선과 심한 보풀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내년에 꺼낸다고 나아지지 않아요.
빈티지를 정말 좋아하시고 그걸 멋지게 연출할 자신이 있으면 예외입니다. 아니라면 그냥 보내세요.
여기서만 과감해지면 됩니다. 나머지 두 무더기는 안 버려도 됩니다.
5. 3단계 — 보관은 소재가 결정합니다
여기가 제 직업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부분입니다.
다만 먼저 솔직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창고에서 관리하던 건 판매할 상품이었습니다.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었고, 각각 개별 폴리백에 포장돼 있었습니다. 옷끼리 서로 닿지도 않았어요.
집 옷장은 조건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옷은 입은 옷이고, 포장돼 있지 않고, 서로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창고에서 하던 걸 그대로 집에 옮길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건 옷이 어떻게 상하는가지 창고 관리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다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상품에는 땀이 없었습니다. 우리 옷에는 있습니다.
여름옷은 대부분 버려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잘못 보관해서 못 쓰게 됩니다.
세탁하고, 완전히 말린 뒤에 넣으세요
이건 타협이 안 됩니다.
여름옷에는 땀과 피지가 남아 있습니다. 눈에 안 보여도 있습니다. 한 번 입고 벗어둔 티셔츠도 마찬가지예요.
그 상태로 6개월을 밀봉해두면 다음 해에 얼룩과 냄새로 나타납니다. 넣을 때는 멀쩡했는데 꺼내니 누렇게 된 옷, 다들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그게 이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건 대부분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세탁만큼 중요한 게 완전히 마르는 것입니다. 겉이 말라도 두꺼운 부분은 덜 마른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쯤 더 널어두셔도 됩니다.
압축팩은 얇은 옷에만
반팔 티셔츠, 얇은 원피스, 린넨 셔츠는 압축팩에 넣어도 됩니다. 부피가 확 줄어서 침대 밑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니트는 안 됩니다.
니트는 실을 짜서 만든 구조입니다. 천을 잘라 붙인 게 아니라 고리들이 서로 걸려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눌리면 그 조직이 그대로 주저앉습니다.
다음 해에 꺼내면 어깨가 처져 있고, 형태가 안 돌아옵니다. 세탁해도 안 돌아옵니다.
이게 이 글 제목으로 뽑은 이유입니다. 제가 제일 안타깝게 본 경우거든요. 아끼는 니트일수록 잘 보관하려고 압축팩에 넣으시더라고요.
니트는 접어서 상자에 여유 있게 넣으세요.
니트는 걸어두는 것도 안 됩니다
옷걸이에 걸면 니트 자기 무게로 어깨가 늘어납니다.
두꺼운 니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한 시즌은 버텨도 몇 년 걸어두면 어깨선이 바뀌어 있습니다.
접으세요.
상자에 넣을 땐 두꺼운 것을 아래로
얇은 옷을 아래에 깔면 위에서 눌려 자국이 남습니다. 그 자국은 다림질로도 잘 안 빠집니다.
무거운 것부터 아래로 쌓으세요. 순서만 지켜도 다음 해에 꺼낼 때가 편합니다.
꽉 채우지 마세요
옷도 공기가 필요합니다.
여유 없이 채우면 습기가 갇힙니다. 그리고 갇힌 습기는 냄새가 됩니다.
상자를 하나 더 쓰는 게 옷 몇 벌 버리는 것보다 쌉니다.
6. 못 버리는 옷은 한 칸에 몰아둡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남는 게 있습니다. 계절과 상관없이 못 버리는 옷들이요.
저는 이게 아주 많습니다. 일할 때 입던 재킷과 펜슬 스커트가 여러 벌 있고, 앞으로 입을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걸 억지로 버리라는 조언은 저한테 안 통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씁니다.
못 버리는 옷은 한 칸에 몰아둡니다.
옷장 맨 끝 한 칸, 또는 상자 하나. 그 안에서는 뭐든 괜찮습니다. 대신 그 칸을 넘어가면 그때 골라야 합니다.
이건 제가 물건 전반에 쓰는 규칙이라 집이 어수선한 날에 대한 글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버릴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결정입니다.
다만 미룬 것들이 옷장 전체에 흩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흩어져 있으면 매일 눈에 밟히고, 매일 조금씩 판단을 요구합니다.
한 곳에 모여 있으면 그건 관리되고 있는 겁니다.
7. 버릴지 말지는 넣을 때가 아니라 꺼낼 때 정합니다
사실 이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넣을 때가 아닙니다.
작년 가을 상자를 여는 순간입니다.
상자를 열었는데 반가운 옷이 있습니다. 그건 남깁니다.
그런데 열었을 때 아무 느낌도 안 드는 옷이 있습니다. 이게 있었나 싶은 옷이요.
1년 동안 없어도 아쉽지 않았던 옷입니다.
이때가 판단하기 제일 쉬운 순간입니다.
옷장에 걸려 있을 때는 매일 보니까 정이 듭니다. 그런데 1년 만에 상자에서 꺼내면 감정이 빠진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재고 실사할 때랑 비슷한 눈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버릴지 말지를 넣을 때 정하지 않고 꺼낼 때 정합니다.
넣을 때는 아까워서 아무것도 못 버립니다. 꺼낼 때는 훨씬 수월합니다.
순서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계절에 뭘 못 버리셨다고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판단은 내년으로 미루면 됩니다. 대신 상자에 날짜만 적어두세요.
정리하면
- 물건보다 기준을 먼저 정합니다. 몇 번 입었나, 내년에 어떨까
- 전부 꺼내지 마세요. 앞뒤 자리만 바꿔도 절반은 끝납니다
- 여름옷은 세 무더기로만. 입은 것 / 안 입은 것 / 상한 것
- 세탁하고 완전히 말려서 넣으세요.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 압축팩은 얇은 옷만. 니트는 접어서 여유 있게
- 두꺼운 것을 아래로, 꽉 채우지 말 것
- 못 버리는 옷은 버리지 말고 한 칸에 모으세요
- 버릴지 말지는 넣을 때가 아니라 꺼낼 때 정하세요
옷장 정리는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침에 옷장을 열었을 때 오늘 입을 옷이 바로 보이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힘을 빼는 게 오히려 낫다는 이야기는 힘을 뺄수록 멋있어집니다에도 썼습니다.
함께 이야기해요
여러분은 환절기 옷장 정리, 어디서 제일 막히시나요?
꺼내는 것? 버리는 것? 아니면 다시 넣는 것?
그리고 혹시 압축팩에 니트 넣으셨던 분 계신가요.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댓글로 편하게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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